1921년 해리와 릴리안 베이츠 사이에서 태어난 로이는 타고난 모험가였습니다. 다섯 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로, 다른 형제들은 모두 유아기나 어린 시절에 사망했습니다. 15세 때 그는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여 국제여단에 합류하며 모험을 추구했고, 결국 지브롤터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그는 스미스필드 육류시장에서 로드 베스티와 함께 견습으로 일하며, 아르헨티나에서 목장을 운영할 계획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가장 가까운 징집 사무소에 등록했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로열 퓨질리어스 제1대대 런던시 연대 보병 소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제8인도사단에서 복무하며 아프리카, 이탈리아, 이라크, 시리아 등 여러 전쟁 지역에서 전투를 경험했습니다. 한때 로도스 섬에서 추락한 비행기에서 포로가 되었고, 탈출을 시도하던 중 어부 배를 훔치다 파시스타에게 붙잡혔으나, 지나가던 독일 장교에 의해 총살형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는 몬테카시노 산 정상 수도원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에도 참여했으며, 독일군이 북이탈리아로 향하는 연합군의 진격을 강력히 막아섰습니다. 그는 "군대는 사막에는 따뜻한 옷을, 이탈리아의 추운 산에는 반바지를 입힌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번 부상을 입고, 두 번 포로가 되었으며, 말라리아, 모래파리 열, 동상, 뱀 물림 등 다양한 전쟁 부상을 겪었습니다. 한 번은 독일 수류탄이 근처에서 폭발하여 턱이 부서지고 얼굴에 파편이 박히는 끔찍한 부상을 입었을 때, 군의관은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여자친구나 아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상은 치유되었고, 그는 이후 아름다운 아내 조안을 만났습니다. 그는 전쟁을 즐겼다고 말하며, 왕과 조국을 위해 대영제국의 사방을 방어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는 모국에서 벗어나 시랜드를 건국한 역설에도 불구하고, 모국이 필요하다면 다시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전후, 그는 남부 아일랜드에서 북부 배급 지역으로 육류를 기차로 수입했습니다. 또한 말레이시아에서 라텍스를 수입해 수영용 오리발을 제작했습니다. 이후 그는 에섹스 해안에서 근해 어선을 운영하며, 육류 체인점, 도매 육류 창고, 한때 부동산 중개업도 운영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 그는 '해적 라디오' 현상에 매료되어 녹존 요새에서 라디오 에섹스를 개국했습니다. 이후 해양법 위반으로 기소되자, 가족을 펠릭스토우 북쪽 7.5마일 떨어진 러프스 타워로 옮겼습니다. 로이는 요새 섬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시랜드 공국'이라 명명했으며, 1967년 9월 2일 사랑하는 아내 조안에게 공주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이는 매우 낭만적인 행위였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많은 모험, 영국 정부와의 마찰, 테러 공격 등을 겪었습니다. 부유한 시기도 있었고 어려운 시기도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TV 인터뷰에서 그는 "젊어서 죽을 수도 있고 늙어서 죽을 수도 있지만, 지루해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수년간 알츠하이머병을 앓은 후, 로이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으며, 미망인 조안, 아들 마이클, 딸 페니를 남겼습니다.
‘인생보다 큰 사람’이라는 표현조차 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매우 그리워질 것입니다.